* 사용된 사진의 출처는 모두 보드게임긱입니다.
협력 게임 (Cooperative game)은 하나의 큰 카테고리입니다. 일반적인 보드 게임에선 사람들끼리 경쟁하여 누가 이기는지 겨루며, 이는 아메리트래시건 유로게임이건 워게임이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협력 게임에선 사람들이 힘을 합쳐 게임을 상대합니다. 즉 모두가 이기거나, 게임이 이기고 모두가 지거나 두 가지 결과가 있게 됩니다. 이 개념은 보드 게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생소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협력 게임의 시초로 보는 게임은 라이너 크니지아의 역작 반지의 제왕 (Lord of the Rings, 2000)입니다. 이후 발매된 팬데믹 (Pandemic, 2008)이 역대급 히트를 치면서, 수많은 협력 게임이 발매되게 되었습니다.
('유로게임 그 자체'인 라이너 크니지아의 작품이 협력 게임의 시초라는 점도 곱씹어보면 재미있습니다.)
이러한 협력 게임은 가능성도 무한하지만, 태생적으로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목소리 큰 한 명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명령하며 혼자 게임하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플레이어를 알파 게이머 (Alpha gamer)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플레이어의 잘못일 경우가 대다수지만, 알파 게이머가 생기도록 유도하는 협력 게임도 분명 존재합니다.
2. 게임을 한 번 이기고 나면 '게임을 깼다'는 기분이 들기에 별로 하고 싶지 않아지고, 리플레이성이 떨어집니다.
협력 게임들은 이러한 단점들을 극복해야했습니다. 특히 알파 게이머는 협력 게임을 디자인할 때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며,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스페이스 헐크: 데스 앤젤 (Space Hulk: Death Angel, 2010)에는 이벤트 카드가 나오며, 이는 드로우한 당사자 혼자 보고 어떻게 할 지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비 (Hanabi, 2010)에선 간단한 역발상이 돋보이는데, 자신의 카드를 자신이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다른 플레이어들의 힌트에만 가지고 카드를 내려놓을지 말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즐드 (The Grizzled, 2015)에서 내 카드는 모두에게 비공개이며, 다른 플레이어들의 카드를 정확히 추측해내지 못하면 이길 수 없는 게임입니다.
(이러한 간단한 룰의 카드 게임이 오히려 협력 게임의 진수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협력 게임들 중 상당수가 덱 빌딩* (Deck buildling) 메커니즘을 채용한 것도 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덱 빌딩은 내 카드를 나만 볼 수 있고, 내가 가져온 카드가 언제 손에 들어올지는 완전히 랜덤이기 때문에, 알파 게이머가 개입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기껏해야 어떤 카드를 사라는 정도의 충고밖엔 하지 못하죠. 레전더리 인카운터: 에일리언 (Legendary Encounters: An Alien Deck Building Game, 2014)**, 섀도우런: 크로스파이어 (Shadowrun: Crossfire, 2014), 빅 북 오브 매드니스 (The Big Book of Madness, 2015) 등 덱 빌딩을 활용한 협력 게임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덱 빌딩 메커니즘은 오히려 협력 게임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파 게이머 증후군을 방지하기 위한 또다른 방법은 게임을 아예 실시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게임이 실시간으로 진행되면 자기 할 것을 하느라 바빠 다른 플레이어들이 뭘 하는지 신경 쓸 틈이 없습니다. 스페이스 얼럿 (Space Alert, 2008), 탈출: 사원의 저주 (Escape: The Curse of the Temple, 2012), 퓨즈 (Fuse, 2015)는 모두 10분의 게임 시간 동안 특정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실시간 협력 게임입니다. 이들 게임은 특히 취향이 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협력 게임이 호불호가 갈리는 실시간 게임과 결합하면 호불호가 매우 갈리게 됩니다.)
리플레이성 역시 고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협력 게임의 초창기엔 난이도를 극악으로 올려, 게임 자체를 이기기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임이 어려우면 이길 때까지 도전하게 되는게 사람 심리니까요. 아컴 호러 (Arkham Horror, 2005), 고스트 스토리즈 (Ghost Stories, 2008),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Adventures on the Cursed Island, 2012) 등은 열 게임을 하면 한 두 게임 이길까 말까 하는 극악의 난이도로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좌절에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게임은 오히려 플레이어들을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단점을 역으로 접근하여, 어차피 한 번 이상 하지 않을 거라면 한 번만 하도록 만든 게임들도 있습니다. 마이스 앤 미스틱 (Mice and Mystics, 2012)과 안도르의 전설 (Legends of Andor, 2012)은 롤플레잉 게임을 보드 게임으로 옮겨놓은 듯한 진행이 눈에 띕니다. 여러 개의 시나리오가 존재하고,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쳐 한 시나리오를 깨면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도록 되어 있지요.
(최근 킥스타터를 통해 하루에 100개씩 쏟아져 나오는 던전 탐험류 게임들 역시 이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5년 최고의 문제작 팬데믹 레거시 (Pandemic Legacy: Season 1, 2015)와 타임 스토리즈 (T.I.M.E Stories, 2015) 역시 한 번 하면 다시 할 수 없는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게임들은 게임 자체에도 신경을 쓰지만 스토리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이 눈에 띕니다. 협력 게임에 있어서만큼은 플레이어들이 같은 스토리를 즐기고 그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이 중 팬데믹 레거시는 보드와 카드에 스티커를 붙이고 제거된 카드를 찢어버리는 등 게임에 영구적인 변형을 가한다는 충격적인 게임성을 선보였는데, 그 재미와 완성도를 인정받아 2016년 1월 1일에 결국 보드게임긱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팬데믹 레거시는 게임이 시키는 대로 스티커를 붙이고 카드를 찢어줘야 게임을 100% 즐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협력 게임은 정말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고, 경쟁을 싫어하는 많은 게이머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협력 게임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게 세미협력 게임 (Semi-cooperative game)으로, 이는 따로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는 TCG/CCG/LCG 등 게임 전에 덱을 짜는 게임과는 다른 메커니즘입니다. 도미니언 (Dominion, 2008)으로 대표되는 게임 내에서 카드를 내 덱에 추가하여 강화시키는 류의 게임을 뜻합니다.
** 원작이라 할 수 있는 레전더리 마블 (Legendary: A Marvel Deck Building Game, 2012)은 세미협력으로 분류하여 명시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