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스 (BRASS)
나는 게임을 ‘차세대 예술 작품’으로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단순히 재미를 떠나서, 시스템의 직관성과 간결성, 테마가 느껴지는 여부, 기존의 작품들에 대한 혁신성 따위를 따진다. 실제로 내가 가장 재미있어 하는 게임이 18xx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브래스는 여전히 내게 있어 최고의 보드게임이자, 예술 작품으로써도 인류 최고의 보드게임이라고 생각한다. ‘17세기 영국 중서부 지역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일러스트도 엄청 칙칙한, 마냥 무거운 고전게임이네’싶은 게임 브래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브래스의 배경, 산업혁명은 값비싼 면직물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방적기/방직기가 개발되면서 가속화되었다. 무한에 가까운 면직물 수요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방직공장이 세워졌으며, 공장에 필요한 기계와 동력 때문에 석탄광산과 제철소가 세워졌다. 결국 수요와 공급이 이 게임의 핵심이며, 단순히 산업시설을 건설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수요가 없으면 이들은 의미 없는 버려진 건물이 될 뿐이다. 그럼 이 ‘수요’는 어떻게 발생하고, 이에 대한 ‘공급’을 어떻게 보드게임으로 구현했을까?
브래스에 등장하는 산업 시설물들. 면직물공장, 항구, 석탄광산, 조선소, 그리고 제철소.
레벨이 높아질수록, 공장/광산을 건설할 때 마다 석탄과 철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이중 석탄은 산업건물들이 대형화 되면서 절실해진 동력자원이다. 단순히 ‘일회용 석탄’쯤이 아니라, 안정적인 연료 공급이 가능한지를 확인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석탄을 끌어올 때는 루트가 연결이 되었는지가 그렇게 중요하다. 철강 역시 중요한 자원이지만, 이는 연료가 아니다. 석탄과의 취급이 다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각 자원에 대한 수요와 공급은 결국 ‘플레이어들이 직접 만들고 쓰는’, 말하자면 ‘플레이어 간의 경제활동’에 의해 충분한 당위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면직물 공장, 그곳에서 나오는 면직물들은 어떻게 판매가 이루어지는 걸까. 그리고 석탄광산과 제철소는 어떻게 수익을 얻는가. 답은 간단하다. 타일을 뒤집기만 하면 된다.
건물을 건설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했더라도, 이 건물은 아직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수익이 나기 위해서는 고정된 판매처가 있어야 한다. 모든 건물들은 이 ‘판매처’를 찾아서 고정된 수익을 내야하고, 그 때 타일이 뒤집힌다. 면직물 공장은 국내 수요로는 더 이상 막대한 생산량을 감당할 수 없다. 해외 식민지에 면직물을 공급하기 위해 항구를 필요로 한다. 항구 타일과 면직물 타일을 같이 뒤집음으로써, 면직물 공급체계가 완성이 된다. 석탄광산과 제철소는, 생산되는 자원들이 남겨지지 않을 때 자동으로 뒤집히면서 수익이 발생한다.
자원들 역시 철저하게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공급과 수요를 해결하는 가장 보편적인 메커니즘이 있다. 매 라운드 생산되는 자원을 매 라운드 다른 플레이어나 보드판에 제공하면서 매 라운드 별도로 수익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매우 번거로운 과정이며, 산업혁명 당시 자본가들의 핵심 관심사였을 막대한 재화의 ‘고정된 공급처, 고정된 수요’와는 맞지도 않다. 이를 타일 뒤집기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테마와 간결함을 한 번에 잡은 것은 가히 천재적이라 불릴 만 하다.
뿐만 아니라, 사업체의 규모가 커지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영의 비효율성’역시 브래스에서도 구현이 되었다. 각 건물들을 뒤집으면서 발생하는 수익은 고정되어있지 않다. 숫자가 쓰여 있는데, 이 숫자는 ‘수익마커를 전진시키는 칸 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수익트랙은 처음에는 한 칸씩 수익이 증가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두 칸, 세 칸 심지어 네다섯 칸이 되기도 한다. 매 라운드 별도의 사업 규모를 계산할 필요 없이, 수익 트랙만 보면 된다.
위로 올라갈수록 색깔이 바뀌는 칸 숫자가 늘어난다.
이 수익트랙 시스템은, 브래스의 또 다른 핵심인 ‘대출 시스템’과 맞물려 훨씬 전략적 의미를 지닌다. 사업체에 있어서 ‘자산’이라 함은, 재산 뿐 아니라 대출가능한 금액을 포함한 개념이다. 이들에게 대출금은 그자체로 운용금액인 것이며, 별도로 대출을 갚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개념이다. 이는 마찬가지로 번거로운 ‘대출 증서’따위나, ‘매 라운드 발생하는 이자’를 지불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브래스에서의 대출이란, 자신의 수익 트랙을 밑으로 내리는 것으로 이루어 진다. 대출 이자만큼 수익마커를 내리고, 돈을 받는다. 위의 이야기와 조합해서 생각해보면 ‘현재의 고정수익이 높을수록, 수익 마커는 더 많이 밑으로 내려간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결국 대출을 언제 받는가. 사업이 본격화되기 전에 많은 자금을 마련해 둔 상태에서, 이자를 버텨가면서 건물들을 건설하는 것을 고민하게 만든다. 안전하게 돈이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대출받는 단순한 장치가 아닌 것이다.
산업혁명 당시 아무리 자본이 많은 사업가라도, 정보는 당연히 무한하지 않았다. 21세기 정보화시대인 현재에도 정보의 격차는 발생하고, 사람들은 최선의 수를 찾는 것 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사고하는데, 그 당시는 정보의 제한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는 ‘카드시스템’을 통해 구현된다.
브래스는 매 라운드 두 장의 카드를 쓰고, 두 장을 다시 보충 받는다. 카드 덱이 다 떨어지면 두 장씩 쓰기만 하며 결국 모든 카드를 다 쓰면 한 페이즈가 끝이 난다.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나에게 없는 카드는 쓸 수 없다’는 것과 함께, ‘한번 들어온 카드는 언젠간 써야한다’는 것이다.
손에 있는 이 카드들로, 영국의 산업혁명에 뛰어들어야 한다.
각 플레이어는 저마다 ‘상황에 맞춰서 최선의 수’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나에게 주어진 카드들로 상황을 이용하는 방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물론 게임의 운적 요소로 인해 전략성을 약화시킨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불확정성 때문에 항상 다양하게 플레이되고, 플레이어들은 제한된 환경에서 최선을 수를 찾기 위해 훨씬 전략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게다가 그 불확정성이 대처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전체 손의 1/4만 새로 충원되며, 그 카드를 쓰는 시기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카드를 쓰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 만큼 전략게임의 본질을 막는다고 볼 수도 없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후발 주자인 대륙의 산업혁명과 양상이 많이 달랐다. 이는 영국의 선례를 참조하여 국가 주도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좀 더 직접적인 차이라면 아마 ‘운하’의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브래스는 아예 게임의 페이즈를 두 페이즈로 분리하였다. ‘운하시대’와 ‘철도시대’로.
이제 플레이어는 시대가 빠르게 급변하는 것을 게임에서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페이즈의 변화에 따라서 맵은 큰 변화를 맞는다. 기술력이 떨어지는 건물들은 맵 위에서 사라지며(물론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수익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기여도에 따른 점수를 한번 획득한다. 페이즈 분리의 의미는 한번 게임을 환기시킨다는 것뿐만 아니라, 한번 전략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에도 있다.
운하 시대의 끝. '1'이라고 쓰여진 건물들은 모두 사라진다.
운하시대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사라진 와중에도, 남아있는 건물들은 철도시대때 그 플레이어의 거점이 된다. 각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처음에는 없던 ‘중심지’가 생기며, 이런 상황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카드역시 한번 순환이 되어 새로 받게 된다. 이를 통해 운송수단이 운하에서 철도로 바뀐 시대적 변화를 절감하게 된다. 모든 게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야했던 당시 자본가들의 심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산업혁명기의 꽃, '철도'시대가 시작된다.
이 게임은 결국 철도시대가 끝나고, 점수가 가장 높은(수익이나 돈이 아니다)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게임이다. 악덕 자본가는 역사에 좋게 쓰이지 않는다. 점수는 곧 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브래스라는 게임 한판을 통해서, 각 플레이어들은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을 발전시키게 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맵을 보며 산업혁명의 역사를 매번 새로 쓰고, 그 당시로 돌아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인류 최고의 보드게임이라면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예술적 경험역시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영국맵이 내게 뭘 주었는가 생각하기 전에, 내가 영국맵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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